샌드박스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 그가 갈망했던 지루함

WONO.ONE 2016. 1. 7. 18:57

 

※ 이 포스팅은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액션 게임에서 엔딩으로 돌진하는 후반부는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화약고를 대방출하는 시간이다. 게이머는 오프닝에서 부터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총알을 적들에게 쏟아 붓는다. 게이머의 화력지원을 받은 주인공은 숙적과의 운명적인 결투에서 승리하고 석양을 배경으로 멋진 뒷모습을 보여주며 게임을 마무리 짓는다. 스텝롤을 바라 보며 엔딩곡을 듣는 게이머는 지금 이 순간 게임이 돈 값을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락스타 게임즈의 <레드 데드 리뎀션>은 엔딩 직전에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상물을 보여준다. 옥수수 창고를 드나드는 까마귀 때를 잡고, 소 때들을 산책시킨다. 문맹인 마누라는 다른 여자가 보낸 편지에 질투심에 바가지를 긁고 아들은 곰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뻔 한다. 인벤토리에 가득 찬 총알이 아깝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이 게임의 주인공 존 마스턴은 이 구질구질한 일상에 큰 불만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사실 이 구성을 공략집에 적힌 글로만 읽었다면 분명 갸우뚱할 유저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 마스턴과 같이 서부를 방랑해온 게이머는 이것이 존이 그토록 갈망했던 지루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인 아버지와 창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부모를 잃고 더치가 이끄는 갱단에 들어가 무법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갱단에서 버림 받은 후 갱 시절에 만난 창녀 아비게일과 함께 가족을 이룬 그는 목장을 경영했지만 부패한 연방 수사관 에드거 로스에게 가족들을 인질로 잡히게 된다. 그는 가족들을 구하고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과거 갱단의 동료들을 잡기 위해 미국 서부에서 고단한 싸움을 시작한다.

 

  존 마스턴은 최소한의 의리와 인정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꺼이 타인을 위해 손해 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은 아니다. 게다가 이미 오래 전부터 살인과 강도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를 전과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샌드박스 게임의 주인공들처럼 그 역시 도덕적인 문제와 반사회적인 단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지폐뭉치나 금고가 아닌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이다. 무법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런 존 마스턴이 원하는 미래가 과거의 동료들을 처단한다고 해서 간단히 주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연방 수사관 로스의 야비한 미소를 보지 않더라도 존과 함께 움직이는 게이머는 어렴풋이 눈치채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게임의 스토리는 존 마스턴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복선을 남기고 있다. 연방수사국과 주 정부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갱단 두목 더치는 스스로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사라지면 놈들은 또 다른 괴물을 찾을 거야! 그들은 그래야 해! 왜냐면 놈들에게는 월급 받을 이유가 필요하니까!" 이 대사는 게임 내내 존과 게이머를 따라다니던 불안감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로스는 보고서를 편하게 쓰기 위해 더치의 시체에 존 마스턴의 총으로 구멍을 남긴다.

 

 퀘스트 "I know you"에서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신사는 존이 가진 죄책감과 죄악을 구체화 시킨 초자연적인 존재다. 그는 언젠가 존이 영원한 안식을 취할 땅 위에 나타나 존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를 조롱한다. 이름을 대라는 존의 외침을 무시하고 어디론가를 사라지는 그를 향해 존은 총을 난사하지만 신사는 아무렇지 않다. 존의 분노는 그 스스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부정하고 싶은 몸부림 같다.

 

 샌드박스 게임은 종종 대리운전으로 대표되는 노동을 강요한다. 자동차가 존재하지 않는 (퀘스트 상에서 등장하지만 전체적인 게임플레이에는 별로 의미가 없다.) <레드 데드 리볼버>의 세계에서도 몇몇 미션들은 총격전을 꿈꾸는 게이머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야생마를 잡고 소몰이를 하는 경험은 이색적이지만 그 일상을 보내기 위해 이 게임을 구매한 게이머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후반부의 노동은 큰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바로 게이머가 이 지루함을 갈망했던 존 마스턴의 고뇌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마스턴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범죄를 통한 한탕이 아닌 가족과 함께 사는 구질구질한 일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저지를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의 게이머가 공감하는 순간 그의 지루한 일상은 디자인의 실패가 아닌 가치 있는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가 갈망했던 지루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에드거 로스는 병사들과 함께 갱단의 마지막 인물인 그를 잡기 위해 그의 목장으로 몰려온다. 죽음을 예감한 존은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병사들에게 살해당한다. 아마 창고의 문을 열고 적들에게 마지막 총탄을 난사하기 직전 존 스스로도 이것이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결말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드 데드 리볼버>는 마지막에 또 다른 구원의 희망을 남겨둔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의 아들 잭 마스턴을 통해 은퇴한 에드가 로스에게 복수할 수 있는 특별미션을 남겨둔 것이다.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 존은 죽음으로 죄 값을 치루었다. 물론 그 과정은 무자비했지만 그가 남긴 잭 마스턴이라는 아들은 아버지의 희생으로 또 다른 구원을 받은 샘이다. 게임 <레드 데드 리볼버>는 서부극의 이야기면서 구원을 찾아 방랑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스토리는 상투적이지만 그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아쉬움 모두 게이머에게 깊은 여운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엔딩 세이브 파일을 저장한 유저 앞에서는 잭 마스턴이 서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완수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게이머는 존 마스턴의 영혼에게 이제 편히 쉬어도 된다는 짧은 위로의 말 한마디를 던져도 괜찮을 것이다.